반응형

1977년 4월 20일 운명의 그날. 이 날 광주시 동구청 소속의 건설반장인 오종환(吳鍾煥) 반장과 동구청 소속 일용잡급직의 철거반원 7명이 무등산을 올랐다. 그들의 목적은 등산이 아닌 바로 이 일대의 무허가 판자촌을 철거하기 위한 산행이었는데, 마침 그즈음에 무등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구청에서 판자촌 주민들에게 앞서 알려 나머지 집들을 철거된 상태였지만, 갈 곳 없는 8가구의 집들만 남은 상황이었다. 이렇게 남은 사람들은 운명의 그날까지 차일피일 철거를 미루며 버티었던 것이다.

절박한 박흥숙과 또한 다른 의미에서 절박한 철거반원 사이에 시비가 붙었는데, 철거반원 중 일부가 어머니를 밀치며 욕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사 결과와 증언에 의하면, 이때까지 박흥숙은 어머니를 말리면서 "저 사람들도 위에서 시켜서 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라며 그들을 동정하였다고 한다. 나아가 철거반이 가재도구를 모두 움막집 바깥으로 옮길 때 박흥숙도 그들과 함께 가재도구를 옮기면서 철거를 협조했다.

그런데 살인사건의 시작은 철거 반원들이 집에 불을 지르면서 시작되었다. 추측건대 단순 철거만 했다간 다시 지어 살 우려가 있으므로 상부에서 완전 전소를 명령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집 지붕에는 박흥숙의 어머니가 무당의 집에서 일을 하며 모은 돈 30만 원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강력하게 항의했다.

여기까지는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은 그가 네 명의 철거반원들을 살해한 결정적 계기는 다음과 같다. 그의 움막집으로부터 300여 m 정도 떨어진 집에는 김복천과 그의 처가 살고 있었는데, 당시 박흥숙은 "저 집에는 병에 걸린 노부부가 살고 있으니 선처해달라."라는 요청을 했고 철거반원은 이를 수락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결국 그 집이 불타는 모습을 본 박흥숙은 엄청난 적개심과 분노에 사로잡혔고, 결국 넘어선 안될 강을 건너고 만다.

이에 대하여 박흥숙은 따져 물었는데, 철거반장 오종환은 "어린놈이 지랄한다."라며 박흥숙을 깔보았고, 더욱 분기가 탱천한 박흥숙은 철거반장 오종환을 향하여 자신이 만든 사제 공기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했다. 그가 사제 총을 만들 수 있던 연유는 바로 그가 열쇠공을 시작으로 금속을 다루는 일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총을 든 그는 철거반장에게 부하 반원들을 모두 모으라고 위협을 가하여 철거반원 7명 중 5명이 불려왔고, 박흥숙은 여동생에게 지시하여 철거반원들을 묶게 하였다. 당시 그가 이들을 결박한 이유는 이 사람들을 결박하여 도망가지 않게 한 뒤 그는 스스로 시내로 가서 당시의 광주시장에게 따지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박흥숙은 포박한 철거반원들을 자신의 공부방으로 파 놓았던 구덩이에 넣은 다음, "불태운 우리 집에 사과해라"라고 호통을 쳤는데, 이 와중에 철거반원들은 마침 헐겁게 묶여 있던 포박을 풀고 반항하였고, 박흥숙은 망치로 그들을 공격해서 5명 중 철거반장 오종환과 동구청 소속 일용잡급직 이건태(李建泰) 등 2명을 현장에서 숨지게 했다. 그리고 또다른 철거반원 양관승(梁官承)과 윤수현(尹壽鉉), 김영철(金永喆) 등 3명은 동구 서남동 조선대학교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양관승과 윤수현은 치료 도중 숨졌고, 김영철은 중태에 빠졌다. 이것이 박흥숙 살인사건이다.

혼자서 7명을 상대한 박흥숙.. 분노가 부른 참극이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