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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전이 시작되자 프랑스군은 정보를 얻는 최고의 방법이 정찰기를 돌리는 것

 

그리고 포로를 심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

 

그래서 탄생한 개념이 참호 습격임

 

 

습격은 굉장히 어렵고 복잡한 임무였음

 

장 까이유는 1919년에 이에 대한 자기 경험을 담은 논문을 썼는데, 겨우 10분 안에 끝나는 이 임무를 설명하는데 약 150p를 썼음

이게 바로 그 책(L’art de faire des prisonniers)인데

 

안타깝게도 읽을 방법이 없음

또한 당대엔 어떻게 습격하는 게 좋을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많은 실패가 선행되었음

 

장 까이유에 따르면, 이 때문에 1915~1916년엔 거의 모든 군단에서 습격 임무가 기피되었다고함

 

이런 상황에서 모범이 된 건 제2 캐나다 보병여단이였는데

 

캐나다군이 1915년 11월 16~17일에 메신느 지역에서 벌인 참호 습격이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연합군 전체에게 큰 영감을 줬다고 함

습격의 첫번째 난점은 무인지대를 건너는 것이였음

 

안들키고 건너려면 일단 빨간색부터 없애야 했는데

 

프랑스군이 1차대전 직전인 7월 9일에

새로운 군복을 채택했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됨

 

다만 완전 교체까지는 약 1년이 걸렸음

두번째 난점은 무인지대에 깔린 철조망이였음

 

기본적인 해결법은 절단기였는데, 느리다는 단점이 있었음

 

그래서 프랑스군은 폭탄 막대기를 개발했음

 

빠르고 편하지만 적이 보고 듣기 딱 좋다는 단점이 있었음

 

세번째 해결법은 사다리였음

 

사다리로 철조망을 깔아뭉개고 지나가는 거임

 

사다리는 무겁지만, 어차피 적 참호에 몰래 들어가고 빠져나오려면 필요했기 때문에 단점은 아니였음

습격에 필요한 무기는 일단 총

 

참호 안에서 싸울 땐 르벨 소총 보단 기병용 카빈이나 권총이 더 실용적이였음

 

짤은 리볼버를 올렸지만, 까이유는 자동권총을 추천함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수류탄이였음

 

수류탄이 총알보다 사상자를 4배 많이 냈다고 함

 

그래서 수류탄을 인당 10개씩 들고 다님

칼이나 둔기같은 건 도구가 아닌 무기로서는 큰 쓸모가 없었음

 

프랑스군은 1916~1917년에 사상자 통계를 낼 때 단검, 총검 등 냉병기에 의한 사상자가 1% 미만이라 표에 집어넣지도 않았고

 

까이유는 냉병기를 코흐 프랑의 장비 목록에 집어넣지 않았음

또다른 필수요소는 자동소총이였음

 

이전 글에서 글자를 잘못 보고 기관총이라고 번역함

 

그 외엔 시계, 부상자 후송용 들것, 2m짜리 사다리 4개, 나팔 1개, 신호탄, 조명탄, 나침반이 필요했음

(전간기 때 장 까이유)

그리고 사람도 중요했음

 

앞도 잘 안보이는 야간에 들키면 끝장인 매우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며 복잡한 남의 참호 안에서 지휘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였기 때문에 최고의 병사와 부사관을 모아야만 했음

이런 자질을 가진 특공대의 명칭은 코흐 프랑

 

(정확히 말하자면, 부대별로 명칭이 중구난방이였다가 나중에 코흐 프랑으로 통일됨)

 

1917년 기준으로 코흐 프랑은 총 20000명이였고

 

대다수가 지원자였음

 

이들은 평소엔 후방에서 매일 훈련하며 기술을 갈고닦았고

 

작전 준비 중에 포로를 잡아 정보를 얻는 용도로

 

혹은 조용한 전선에서 적을 소모시키고 압박하는 용도로 전선에 투입됨

이들이 근접 전투에 숙련된 만큼 필요하다면 공세 중 네뚜아이외르의 역할을 대신할 수도 있었는데, 일반적인 사용법은 아니였음

 

지휘관의 성향에 따라선 코흐 프랑을 작전 직전에 임시로 해체하고 정예부대로 써먹기도 함

습격은 반드시 10분 이내에 끝나야 했음

 

코흐 프랑은 봉쇄조·방어·소탕로 구성되었고 팀당 인원은 30명

 

한명의 지휘관이 3~4개의 팀을 지휘함

 

각 코흐 프랑은 식별을 위한 완장을 차고, 권총과 수류탄과 소이수류탄으로 무장했음

 

부사관은 전등을 하나씩 보유함

 

각 팀의 작전지역은 정면 100m, 종심 200m를 넘지 않았음

 

습격은 대게 해질녘에 시작되었는데,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조율을 끝낸 후 일광이 사라지면 출발하기 위해서임

 

철조망을 통과할 땐 위에서 언급한 3가지 방법을 상황에 따라 선택함

 

소수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나중에 후퇴를 도움

적 참호에 접근하는데 성공하면 사다리를 이용해서 몰래 내려감

 

이 때 팀이 참호망을 특정 구역으로 나눠서 포위하도록 배치됨

 

방어조는 참호로 내려가지 않고 2정 이상의 자동소총으로 적이 참호 밖에선 움직일 수 없게 만듬

 

봉쇄조는 참호 안에서 통로를 막아 참호망 내에 폐쇄된 구역을 만듬

 

소탕조는 폐쇄 구역 안에서 적을 생포하고 문서를 노획함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무기를 보여주기만 해도 항복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격렬한 싸움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함

 

여유가 있다면 돌아가기 전에 수류탄으로 적의 장비를 파괴했음

(이건 1916년 프랑스군 보병전술 교리.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봉쇄는 일반적인 전투에서도 기본이였음

 

저 fusilier는 자동소총병을 뜻함)

 

 

지휘관이 호루라기, 나팔 등으로 신호를 주면 즉시 모든 코흐 프랑이 일사불란하게 후퇴함

 

먼저 소탕조가 포로와 함께 사다리를 타고 빠져나왔고

 

그 뒤를 봉쇄조가 뒤따름

 

그리고 끊어진 철조망에서 대기하던 이들의 엄호를 받으며 자기네 참호로 돌아감

 

보통 10분이 지나면 적이 습격을 알아챘기 때문에 10분 안에 이 과정을 끝내야 했음

 

만약 30분이 지나도록 코흐 프랑이 돌아오지 않으면 위기에 처한 것으로 간주하고 포격과 함께 구조 작전이 시작되었음

 

습격 작전이 끝나면 포상휴가가 주어짐

 

 

 

코흐 프랑의 습격은 당대에 보병이 포병의 지원 없이 벌일 수 있는 최선의 전투 방식이였음

 

하지만 코흐 프랑 교리가 완전히 성숙해진 1917년엔 이야기가 좀 달라지는데

 

1917년이 되자 기술이 발전하고 숙련도도 쌓이고 현대식 중포도 확보된 결과, 습격을 포병이 정교하게 지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임

 

 

 

 

프랑스군은 적의 참호를 점령하는 목적이 아닌 공격을 '바 에 비앙' 이라고 불렀는데(갔다 온다는 뜻)

 

1917년 2월 28일에 GQG에서 바에비앙을 수색, 헤드, 꾸드망 3가지로 구별하는 교리를 발표함

 

헤드와 꾸드망은 사전적으로 같은 의미인데

 

GQG는 헤드를 코흐 프랑의 암습에 의존하는 기존의 소규모 습격으로

 

꾸드망을 포병과 함께하는 새로운 방식의 습격으로 정의내렸음

꾸드망에선 포병이 탄막으로 습격할 구역의 3면을 막아 상자 안에 폐쇄당한 모양새를 만듦

 

유일하게 뜷려있는 면에선 철조망, 장애물을 쓸어버리고 적을 탄막 상자에 밀어넣는 이동탄막이 올라옴

 

이 과정에서 대포병사격도 같이 함

 

 

 

다양한 탄막을 구사하는 건 1917년의 프랑스군한테 전혀 새로운 전술이 아님

 

다만 정확도가 높아지고 현대식 중포도 충분히 쌓여서 습격에도 써먹을 수 있게 된 것임

 

 

헤드에선 적이 습격을 깨닫는데 참호로 들어간 후부터 10분이 걸렸는데

 

꾸드망에선 적이 습격을 포격 때문에 즉시 깨닫게 됨

 

이전엔 습격에서 화력지원을 해봤자 대포병사격이 불충분하게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았기에

 

우리 지금부터 습격할테니 대비하라고 알려주는 꼴이 되어 득보다 실이 더 컸음

 

팀킬의 위험성은 덤이고

 

 

여기서 현대식 중포가 무슨 상관이냐면, 프랑스군이 의존해야 했던 19세기 드 방쥬 중포의 발사속도가 무려 2분당 1발이였음

 

심지어 사정거리도 짧아서 프랑스군의 대포병은 독일군보다 훨씬 부족했는데, 시간이 지나며 그 문제가 해결되서 대포병사격이 완벽하게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져 득이 실보다 커진거임

 

정확도가 높아지며 팀킬의 위험성이 줄어든 건 덤이고

 

그리고 프랑스군이 기관총 간접사격 교리를 만든 후에는 기관총도 꾸드망에서 화포와 함께 탄막을 만듬

 

프랑스군의 포격이 워낙 신속했고, 대포병사격도 함께 하니

 

독일군은 꾸드망을 막기 위해 SOS탄막을 제때 만드는 게 불가능했음

폐쇄 구역 안에서 포로를 생포하는 방법은 헤드나 꾸드망이나 동일함

 

하지만 포병의 강력한 보호 덕분에 작전 시간을 더 길게 잡을 수 있게 되었고, 거대한 규모로 실행할 수도 있게 됨

 

실전 예시를 한번 보겠음

1918년 1월 16일

 

포헤 드 베장쥬 북쪽에서 제123 보병사단이 꾸드망을 벌였음

 

여기에 투입된 병력은 3개 보병대대, 2개 공병중대, 1개 화염방사기중대

 

범위는 정면 1800m, 종심 2000m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꾸드망은 코흐 프랑에 의지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거대할 수도 있었음

 

제123 보병사단은 꾸드망에 320문의 화포, 200문의 기관총을 배치했고, 비행중대 6개도 습격을 지원함

 

 

습격은 오전 7시 30분에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날 오후 2시 30분에 개시됨

 

이들은 1시간 30분 동안 2km를 전진했고, 45분 동안 소탕을 벌인 후 후퇴함

 

이 습격에서 제123 보병사단이 입은 피해는 38명 전사 67명 부상

 

독일군이 입은 피해는 포로 357명+사상자 약 500명

 

프랑스군은 수많은 정보를 얻거나 노획했고, 덤으로 독일군의 방어체계에 큰 타격을 입힘

 

 

총사령관 필리프 페탱은 각 사단이 1주일에 한번씩 헤드 혹은 꾸드망을 해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음

 

1918년 봄부터는 습격이 끝나면 받는 포상휴가 기간을 늘렸고, 훈장을 더 자주 수여했고, 포상금도 챙겨줬음

 

그 결과 코흐 프랑이 되고 싶어하는 자원자가 많이 늘어났다고 함

 

 

 

아마 1차대전에서 제일 중요했던 습격 중 하나는 1918년 2월 10일에 랭스 동쪽에서 실행된 꾸드망일 거임

 

이 꾸드망엔 3개 보병대대 뿐만 아니라 코흐 프랑도 투입되었는데

 

별 사상자 없이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며 동부전선에서 온 11개 사단의 정보와 위치를 얻어내는 대성과를 거두었음

 

 

 

프랑스 장교들은 꾸드망의 효율성을 알고 있었지만, 병력과 물자의 규모 때문에 습격이라기 보단 일반적인 공세에 가깝다고 지적하곤 했음

 

보급품은 무한하지 않고, 습격에 포탄을 지나치게 쓰면 나중에 진짜 전투 때 포탄이 부족해지니까 한 말임

 

그래서 프랑스군은 꾸드망을 결정적으로만 사용했고

 

일상적으론 코흐 프랑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방식의 습격인 헤드를 사용함

1917년 봄

 

이 시기에 여러 장교들이 독일군의 돌격대를 모방하기 위해 코흐 프랑 대대를 만들기 시작했다고함

 

이는 돌격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일으킴

1917년 5월 15일

 

외젠 드브니가 논쟁 결과를 종합하고 페탱에게 보고함

 

돌격대 창설에 불리한 내용이 담겨있었음

 

장교들의 의견에 따르면 돌격대는 즉각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지만, 장기적인 성과는 얻을 수 없었음

 

그러니 일반 전투에서 코흐 프랑에 의존하는 대신 더 철저한 훈련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결론내림

페탱은 이렇게 발표했음

 

돌격대는 눈앞의 전술적 이득을 위해 장기적인 작전 능력을 버리는 짓

 

군을 강군과 약한 군대로 양분한 다음 전자를 지속적으로 소모시켜 후자만 남기는 짓

 

독일군 총사령부가 자기네 보병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렸다는 증거

 

이 결론은 프랑스군이 1917~1918년 동안 사용한 보병전술인 그루프 드 콤바 전술의 탄생으로도 이어짐

 

그루프 드 콤바 전술에 대해선 다른 글에서 설명하기로 하고

 

어쨌든 이 결론과 함께 코흐 프랑을 돌격대로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사라졌음

다만 프랑스군에 강군과 약한 군대의 구분이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음

 

왜냐하면 돌격사단 6개가 존재했기 때문임

 

제11, 37, 38, 39, 43, 48 보병사단이 돌격사단이였음

 

이 6개 사단은 주아브와 티라이외르 충원, 보급, 훈련 우선권을 지녔음

 

그리고 모로코 사단같은 정예사단도 존재함

코흐 프랑에서 여러 유명인이 배출되었는데, 아마 최고 중의 최고들이 모였기 때문일 거임

 

대표적인 사람으론 제23 보병연대의 팡느로 중위

 

제43 샤쇠르 아 피 대대의 베르나르 드 구벨로 대위

 

보병의 기느메르(연예인같은 인기를 구가한 프랑스 전투기 에이스)라는 별명으로 불린 제418 보병연대의 쥘 보스케

 

제287 보병연대의 모리스 쥬네

 

제116 보병연대의 조르주 델마 등이 있음

 

이 장교들은 7~14개의 훈장을 받았음

 

병사 중에선 알베르 로슈라는 이등병이 유명한데

 

혼자서 1180명을 생포함

장교 중에서 이미 여러번 언급한 장 까이유 대위를 빼놓을 수 없음

 

생 시리앙인 장 까이유는 1915년 1월에 소대장이 되었고, 몇달 후 제113 보병연대에서 코흐 프랑을 조직하고 지휘하는 임무를 맡게 됨

 

이 사람의 개인 전적은 약 100명 생포, 100명 사살로 알베르 로슈에 비하면 인상적이지 않지만

 

진가는 지휘와 교육에 있었음

 

장 까이유가 지휘한 코흐 프랑에선 4년 동안 습격 임무 중 사상자가 24명밖에 나오지 않았음

마지막으로 꾸드망 하나를 더 보겠음

 

이번 꾸드망도 1차대전 중 가장 중요했던 꾸드망 중 하나임

 

프랑스군이 2차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저지하는데 큰 역할을 한 꾸드망이기 때문임

 

 

7월 14일에 제132 보병사단이 독일군의 공세가 임박했다는 걸 알아차렸는데,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몰랐기에 꾸드망을 조직했음

습격 범위는 500m x 500m였는데, 독일군의 Andrinople, Tirnovoa, Radius, Cubitus 참호가 교차하는 곳이 대상이였음

 

제366 보병연대의 꾸드망엔 3개 보병대대에서 차출해서 조직한 코흐 프랑이 투입됨

 

코흐 프랑의 인원수는 176명이였고, 연대장이 공병 16명, 화염방사병 3명, 들것 운반병 8명을 추가했음

 

화력지원은 사단포병이 함

 

보다시피 1918년 1월 16일의 꾸드망과는 달리 규모가 헤드 수준으로 작았음

작전은 오후 7시 55분에 시작됨

 

습격이 매우 정석적으로 이루어져서 과정을 설명하면 이미 언급한 봉쇄니 소탕이니 탄막이니 반복하게 되니 생략

 

코흐 프랑은 2명이 전사했으나 27명의 포로를 잡았고, 참호박격포의 위치가 전부 나와있는 지도를 노획함

 

무엇보다도 독일군의 공격준비사격이 7월 15일 새벽 1시에 시작될 거란 사실을 알아냈음

 

중요한 정보를 얻은 제4 야전군 사령관 앙리 구로는 오후 11시 30분에 포병으로 선빵을 날렸고, 독일 포대가 엉뚱한 곳만 때리도록 병력을 뒤로 빼버렸음

 

이 때문에 화력지원도 못받은 채 돌격하게 된 돌격대가 주 저항선에서 그대로 갈려버리게 됨

 

결국 독일군의 마지막 공세는 양익포위 당하기 딱 좋게 노출되는 결과로 끝났음

 

방어에 성공한 앙리 구로는 이 꾸드망을 '역사적' 이라고 수식하며 코흐 프랑의 203명에게 인당 1만 프랑을 지급함

이후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가 반격을 개시하면서 2차 마른 전투가 즉시 수아송 전투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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